∎ 부서진 꿈 10 ∎ 역사의식의 종말 13 ∎ 모두를 위한 개혁의 결여 15 ∎ 쓰레기 세상 18 ∎ 충분히 보편적이지 않은 인권 22 ∎ 갈등과 두려움 25 ∎ 공통의 경로가 없는 세계화와 발전 29 ∎ 전염병과 역사 속의 재앙 32 ∎ 국경에서 나타나는 인간 존엄성 부재 현상 37 ∎ 소통의 환상 42 ∎ 뻔뻔한 공격 44 ∎ 지혜 없는 정보 47 ∎ 복종과 자기 비하의 형식 51 ∎ 기대 54
수십 년 동안 세계는 수많은 전쟁과 실패에서 배운 것처럼 보였고, 다양한 형태의 통합으로 천천히 움직여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를 들어, 통일된 유럽의 꿈이 발전하여 공통된 뿌리를 인식하고 그곳에서 비롯되는 풍부한 다양성을 기뻐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분단을 극복하고 대륙의 모든 민족 간의 평화와 친교를 촉진하기 위해 협력할 수 있는 능력을 바탕으로 미래를 구상했던 유럽 연합 창립자들의 확고한 신념”을 떠올립니다.[7] 같은 방식으로 라틴 아메리카의 통합에 대한 열망이 커졌고 이 방향으로 몇 가지 단계가 취해졌습니다. 다른 국가와 지역에서는 화해와 조화의 시도가 결실을 맺은 것으로 드러났고, 다른 국가와 지역에서도 큰 가능성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후퇴의 조짐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시대착오적 갈등이 다시 일어나고, 근시안(近視眼), 극단주의, 분노에 가득하고 공격적인 민족주의가 부활하고 있습니다. 여러 나라에서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은 인민과 민족의 통일에 대한 관념이 국익을 지킨다는 주장에 가려진 새로운 형태의 이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있고. 사회적 감각도 상실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상기해야 합니다. “각 세대는 이전 세대의 투쟁과 성취를 계승하여 시야를 더 넓혀야 합니다. 이것이 가야 할 길입니다. 선과 사랑, 정의와 연대는 단번에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조금씩 이뤄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많은 형제자매들이 여전히 우리의 관심을 촉구하며 울부짖는 상황을 모른 척하고 있으면서, 과거에 이뤘던 것에 안주하고, 현실에 만족하며 과거의 성취를 누리는 것으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8]
“세계를 향해 열기(Opening up to the world)”는 경제와 금융 부문에서 채택한 표어입니다. 이제는 이 표어가 모든 국가에서 장애나 성가실 일 없이 투자할 수 있는 외국의 이윤 혹은 경제 권력의 자유만 허용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지역 갈등과 공동선에 대한 무관심은 단일한 문화 모델을 이식하려는 글로벌 경제에 이용당하고 있습니다. 이 문화가 세계를 하나로 만들고 있지만 사람과 국가는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회가 점점 더 세계화됨에 따라 우리는 이웃이 되긴 해도 형제는 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9] 우리는 개인의 이익은 늘리고 삶의 공동체적 차원은 약화시키는 이 표준화된 세상에서 그 어느 때보다 더 외롭습니다. 오히려 개인이 단순한 소비자 또는 구경꾼이 되는 시장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이러한 세계화의 진전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강한 자의 정체성은 강화해주지만, 가장 취약한 지역과 가장 가난한 지역의 정체성은 해체하여 그들을 더 취약하고 의존적이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정치는 “분열시켜 정복하라”를 적용하는 초국적 경제세력 탓에 점점 더 취약해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역사에 대한 감각의 상실이 늘어나고 있으며, 이는 더욱 단절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가 제로(zero; 0)에서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해체주의” 문화가 오늘날 침투하고 있습니다. 그 여파로 남겨진 한 가지가 무한한 소비와 공허한 개인주의의 강조입니다. 이에 대한 우려 때문에 저는 젊은이들에게 여러 가지를 조언하였습니다. “누군가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역사를 무시하고, 연장자의 경험을 거부하고, 과거를 낮춰보고, 자신이 내세우는 미래를 내다보라고 말한다면, 그리로 쉽게 따라가지 않을까요? 그가 그들에게 말한 대로만 행동하지 않을까요? 그에게는 청년들이 얕고, 뿌리 뽑힌 채, 불신하면서 그의 약속만 믿고 그의 계획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다양한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반대(나 저항)없이 지배할 수 있도록 모든 차이를 해체시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과거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영적 부(富)와 인간적인 부를 축출하고 그들 이전에 있었던 모든 것에 무지한 젊은이들이 필요합니다.”[10]
이것이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식민지를 만드는 방법입니다. “다른 사람의 흉내, 폭력을 조장하는데 미쳐서, 혹은 용서할 수 없는 과실이나 무관심에서 자신들의 전통을 버리려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들한테서 혼을 빼앗고, 그들의 영적 정체성뿐 아니라 도덕적 일관성, 궁극에는 그들의 지적, 경제적, 정치적 독립성까지 강탈할 것”[11]이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역사의식, 비판적 사고, 정의를 위한 투쟁 및 통합을 약화시키는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가 이 위대한 단어들의 의미를 공허하게 만들거나 조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민주주의, 자유, 정의 또는 일치 같은 특정 단어들이 실제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단어들은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무의미한 내용, 제목으로 지배의 도구로 기능하도록 조작되고 변형되었습니다.
사람들을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특정 가치를 지키는 것처럼 위장하여 절망과 낙담을 퍼뜨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국가에서 과장, 극단주의와 양극화가 정치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조롱, 의혹 및 끊임없는 비판 전략을 사용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다른 사람이 존재하고 생각할 권리를 부정합니다. 진리와 가치에 대한 그들의 몫은 부정되고 결과적으로 이 사회는 가난하고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이들의 오만에 던져지게 됩니다. 정치 생활은 더 이상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고 공동선을 발전시키기 위한 장기 계획에 대한 건전한 토론이 아니라 일시적인 마케팅 방법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 끔찍한 의심과 그에 대한 반격, 논쟁으로 불일치와 대결이 항구적 상태가 돼버립니다.
경쟁 상대를 쓰러트리는 것이 승리인 이해관계의 충돌에서 우리의 고개를 들어 이웃을 알아보거나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인류 가족 전체의 발전이라는 큰 목표를 세우는 계획은 망상처럼 들립니다. 우리 사이의 거리는 멀어지고 있고, 점점 더 일치되고 정의로운 세계를 향한 힘들고 느린 길은 새롭고 극적인 좌절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세상을 돌보고 우리는 지원하는 것이 결국 자신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점점 더 우리 자신을 공동 가정에 사는 한 가족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관심은 조기에 이익을 실현하려는 경제 강국에는 쓸모없는 생각입니다. 종종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제기되는 목소리는 침묵 당하거나 조롱을 당해 합리성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특별한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숨겨줍니다. 우리가 만들어가는 이 얕고 근시안적이며, 공통의 비전을 결여한 문화에서 "일부 자원이 고갈되면 고귀한 주장으로 위장하더라도 새로운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가 만들어지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12]
우리 인간 가족의 일부는 제한 없이 살 가치가 있는 이들로 여겨지는 (소수의) 다른 사람들을 위해 쉽게 희생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궁극적으로 “사람이 더 이상 보살핌과 존경을 받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특히 가난하고 장애가 있는 사람,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 또는 노인처럼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존재로 간주되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가장 비참한 형태의 하나인 음식 낭비를 시작으로 모든 종류의 낭비에 무심해졌습니다.”[13]
인구의 고령화로 이어지는 출산율 감소, 노인을 슬프고 외로운 존재로 격하시키는 것은 이 모든 일이 우리 모두에 관련된 것이며, 우리의 개인적 관심만이 유일한 관심사라는 점을 교묘하게 서술하는 방식입니다. 이런 식으로 “버려지는 것은 음식과 생활필수품뿐 아니라 종종 인간 자신이 되고 있습니다.”[14]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결과로 우리 세계의 특정 지역에서 노인들에게 일어난 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죽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일이 오랫동안 여름의 폭염 때, 그리고 다른 상황에서도 일어났습니다. 노인들은 어느날 스스로 잔인하게 버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가족의 친밀함과 관심 없이 노인을 고립시키고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돌보게 함으로써 가정 자체를 훼손하고 가난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젊은이들이 자신의 뿌리, 필요한 접촉과 청소년 혼자서 얻을 수 없는 지혜를 빼앗기게 됩니다.
타인을 포기하는 이러한 방식은 심각한 결과에 대한 고려 없이 인건비 절감에 집착하는 등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직접 일어나는 실업이 빈곤 확대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15] 덧붙여, 다른 이들을 신속히 포기하는 것은 인종주의와 같이 오랜 과거였던 사악한 태도들을 지속적으로 밑에서 다시 떠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인종차별의 경우는 여전히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였던 사회적 진보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참되고 결정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부 경제 규칙은 성장에는 효과적이지만 완전한 인간 개발에는 효과적이지 않습니다.[16] 부는 늘어났지만 불평등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빈곤도 출현”하였습니다.[17] 현대 세계에서 빈곤이 감소했다는 주장은 지금 현실에는 맞지 않는 과거의 기준으로 빈곤을 측정한 데 기초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기 에너지를 사용할 수 없는 경우는 빈곤의 징후로 간주되지 않고 심각한 불편을 초래하는 일로 평가되지도 않습니다. 빈곤은 항상 구체적인 역사적 순간에 활용할 수 있는 기회의 맥락에서 분석하고 측정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