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13일)

저는 이 메시지를 COVID19 대유행으로 촉발된 지구적 위기로 난민이 된 이들에게 바치기로 했습니다. 사실, 이 코로나의 전파력, 심각성 및 지리적 범위로 인해 수백만 명에 영향을 미친 다른 수많은 인도주의적 긴급 상황이 초래됐습니다. 그 결과 생명을 구하는 데 필수적인 시급한 국제 협력이 각 나라 정치 의제에서 후순위로 밀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잊을 때가 아닙니다. 우리가 직면한 이 위기(코로나19)를 핑계로 너무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안기고 있는 다른 많은 위기들을 잊어선 안 됩니다”(Urbi et Orbi Message, 2020년 4월 12일). ……

이집트로 피난하는 동안 아기 예수님은 부모님과 함께 실향민과 난민들의 비극적 운명을 경험하셨습니다. 이 비극적 운명은 “두려움, 불확실성, 불안감”이 특징이었습니다(마태 2:13~5, 19~23 참조). 불행히도 우리 시대에는 수백만 가족이 이 슬픈 현실에 직면해 있습니다. 텔레비전과 신문은 거의 매일 자신과 가족을 위해 안전하고 품위 있는 삶을 찾아 기아, 전쟁과 기타 심각한 위험에서 탈출한 난민들의 소식을 전합니다”(2013년 12월 29일 삼종기도). 예수님은 헤롯 시대와 마찬가지로 안전을 찾아 피난을 강요당한 이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주린 이, 목 마른 이, 헐벗은 이, 아픈 이, 이방인, 감옥에 같힌 이들의 얼굴에서 도와달라고 간청하시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라고 불리었습니다(마 25,31~46 참조). 우리가 그들의 얼굴에서 예수님을 볼 수 있다면, 그분을 만나고 사랑하고 섬길 수 있었던 일에 감사하는 사람이 될 수있을 것입니다.

난민들은 우리에게 주님을 만날 수있는 기회를 줍니다. “우리 눈이 그분을 알아볼 수 없을지라도, 그의 옷은 찢겨 있고, 발은 지저분하며, 얼굴은 일그러졌고, 몸은 상처를 입었으며, 그의 혀는 도착한 나라의 말을 할 수 없습니다”(2019년 2월 15일 강론). 우리는 2018년 난민의 날 담화에서 제가 언급한 네 가지 동사 ‘환대하다, 보호하다, 촉진하다와 통합하다’로 이 사목적 도전에 응답하도록 불리었습니다. 저는 이 단어들에다 매우 실제적 행동을 다루고 인과 관계로 함께 연결되는 다른 여섯 쌍의 동사를 추가하려 합니다.

여러분은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합니다. 아는 것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데 필수 과정입니다.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루카 24,15~16). 이주민과 난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너무 자주 이들을 통계로만 인식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통계가 아니라 실제 사람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들을 만나면 그들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됩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알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 코로나 팬데믹의 결과로 우리가 경험하게 된 위태로움이 난민들의 삶에서는 늘 상 마주하는 상황임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섬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까워져야 합니다. 이 사실은 누구나 알 것 같지만 현실에서는 정반대입니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루카 10,33~34). 두려움과 편견이 있으면 그들을 멀리하게 되고, “이웃이 되어”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지 못하게 됩니다. 최근 몇 달 동안 많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우리에게 일깨워준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일은 종종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뜻합니다. 기꺼이 가깝게 다가가 봉사하는 일은 의무감 이상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때 이러한 모습의 예를 가장 잘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겉옷을 벗으시고 무릎을 꿇어 손을 더럽히셨습니다(요한 13,1~15 참조).

화해하려면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우리에게 이 점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는 인간의 귀를 통해 고통받는 이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싶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화해하고 구원하는 사랑은 경청에서 시작됩니다. 오늘날의 세상에서 메시지는 늘어나지만 듣는 행위는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화해는 겸손하고 세심한 경청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2020년에 코로나로 거리가 봉쇄되면서 몇 주 동안 침묵이 지배했습니다. 극적이고 성가신 침묵을 통해 우리는 취약 계층, 난민, 심각하게 병든 지구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경청은 우리 이웃과 “버려진” 모든 사람들과 화해 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경청은 우리 자신과 당신의 자비를우리에게 베푸시는 데 절대 지치지 않으시는 하느님과 화해 할 수 있는 기회도 됩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함께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눔은 초대 교회공동체에서 필수 요소였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사도 4,32). 하느님은 소수만 이 지구의 자원을 누리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성장하기 위해 공유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전염병을 통해 모두가 같은 배에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걱정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아무도 홀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습니다. 진정으로 성장하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께 보리 빵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린 아이처럼, 가진 것을 공유함으로써 성장해야 합니다. …… 그들은 보리빵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는다는 사실을 증명하였습니다(요 6,1~15 참조)!

촉진하기 위해 투신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함께 하셨던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말을 들었고 그녀의 마음에 말씀하셨으며 그녀를 진리에 이르게 해 그녀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 ……

구축하기 위해 협력해야 합니다. 이 점이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공동체에 말씀하신 바입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모두 합심하여 여러분 가운데에 분열이 일어나지 않게 하십시오. 오히려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 하나가 되십시오(1코린 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