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맥락(형제애를 요청하는 성경 본문들) 57 ∎ 길가에 버려진 63 ∎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야기 69 ∎ 이야기의 등장 인물 72 ∎ 새롭게 시작하기 77 ∎ 국경이 없는 이웃 80 ∎ 낯선 사람의 탄원 84

제2장. 길 위의 낯선 사람

  1. 1장을 오늘날의 문제에 대한 냉정하고 먼 이야기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 참으로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든 신자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이 없기”[53] 때문입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가운데서 뿜어 나오는 빛을 찾으려 몇 줄의 실천 방안을 제안하기 전에 저는 2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비유에 이번 장(章)을 할애하고 싶습니다. 이 편지는 종교적 신념에 관계없이 선의를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것으로, 이 비유는 우리 모두가 공감하고 도전할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때 율법 교사가 일어나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선생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는 '율법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거기에서 무엇을 읽어야 합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그러자 그는 스스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옳은 답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하면 살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예수님께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의 손에 넘겨졌는데, 강도가 그를 벗기고 때리며 떠나가는 바람에 반쯤 죽게 되었다. 그런데 우연히 사제가 그 길을 지나고 있었다. 그를 보자 사제는 반대편으로 지나갔다.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게 되었을 때 다른 쪽으로 지나쳐 갔다. 그러나 여행 중이었던 한 사마리아인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를 보았을 때 그는 연민에 사로잡혔다. 그는 그에게 가서 상처에 붕대를 감고 기름과 포도주를 부었다. 그런 다음 그는 그를 자신의 나귀에 태우고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았다. 다음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말했다.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이 세 명 중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라 생각하는가?” 그러자 그는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 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10,25-37).

맥락(형제애를 요청하는 성경 본문들)

  1. 이 비유는 오래된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성경은 세계와 인간 창조에 대하여 설명을 한 직후 인간의 관계 문제를 다룹니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고 하느님께서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을 듣습니다.(창세 4,9). 그의 대답은 우리 모두가 너무 자주 하는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였습니다.(창세 4,9). 카인의 질문에 하느님은 우리 자신의 무관심을 정당화하는 결정론이나 운명론에 호소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우리가 갈등을 해결하고 서로를 돌보는 다른 문화를 만들 것을 권합니다.

  2. 욥기는 한 분 창조주 안에서 우리가 기원한 것을 특정한 공통 권리의 기초로 봅니다. “바로 그분께서 우리를 모태에서 지어내지 않으셨던가?”(욥 31,15). 몇 세기 뒤 이레네오 성인은 멜로디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같은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진리를 찾는 사람은 각 음표와 다른 음표의 차이에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 그는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이 전체 화음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54]

  3. 초기 유대 전통에서는 타자를 사랑하고 돌보아야 하는 의무가 같은 민족 구성원들 간의 관계에 국한되어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레위 19,18)라는 고대 계명은 보통 자신의 가까운 이웃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었는데, 특별히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 발전한 유대교에서는 이웃을 정의하는 범위가 점차로 넓어졌습니다. 우리는 ‘네가 싫어하는 일은 아무에게도 하지 마라’(토빗 4,15 참조)는 말씀을 만나게 됩니다. 기원전 1세기에 랍비 힐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토라 전체입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해설에 불과합니다.”[55] 하느님의 행동 방식을 본받으려는 열망 덕에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만 생각하는 경향이 점진적으로 넓게 생각하는 방향으로 바뀌었습니다. “인간의 자비는 제 이웃에게 미치지만 주님의 자비는 모든 생명체에 미친다.”(집회 18,13)

  4. 신약에서 힐렐의 교훈이 긍정적으로 반영됩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기”(마태 5,45) 때문에 이 명령의 범위는 보편적이며, 우리가 공유하는 인류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 모든 사람을 포용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5. 성경의 가장 오래된 본문에서 우리는 이방인을 포용하기 위해 마음을 더 넓게 가져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성경 본문은 유대인들이 한때 이집트에서 이방인으로 살았던 유대 민족의 오래된 기억에서 나온 것입니다.

“너희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탈출 22,20).

“너희는 이방인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으니, 이방인의 심정을 알지 않느냐?”(탈출 23,9)

“너희 땅에서 이방인이 너희와 함께 머무를 경우, 그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와 함께 머무르는 이방인을 너희 본토인 가운데 한 사람처럼 여겨야 한다. 그를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레위 19,33-34)

“너희는 포도를 수확할 때에도 지나온 것을 따서는 안 된다.…너희는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종이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신명 24,21-22).

형제적 사랑을 요청하는 내용은 신약 전체에서도 등장합니다.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갈라 5,14).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1요한 2,10-11)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1요한 3,14)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