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태언 요셉 신부 / 신앙교육원 부원장
미사와 성사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생활의 핵심이라는 교회의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미사 중단’이라는 중대한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교회가 미사와 성사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깊은 성찰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중요하다고 가르쳐 왔던 미사와 성사를 스스로 중단시켜야 했던 역사를 극복하기 위한 중대한 노력에서 미사와 성사의 집전자인 사제들은 더 큰 책임감으로 신자들을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신자들 역시 그동안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여겨왔던 미사와 성사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미사와 성사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특징은 ‘전례적 행위’로서의 미사와 성사일 것입니다. 그러나 미사와 성사를 ‘전례적 행위 혹은 행사’로만 인식한다면, 미사와 성사 중단은 신자들에게도 사제들에게도 ‘이제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무기력하고 우울한 현실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미사와 성사가 올바른 ‘전례적 행위’가 되기 위해 중요한 요소로 강조해왔던 “현장성(現場性)”을 제대로 지킬 수 없다는 것이 무기력함과 우울함을 가중시키기도 할 것입니다. ‘모여야 한다는 일’ 자체가 불안한 요소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미사와 성사의 의미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전례적 행위로만 국한될 수 없습니다. 미사와 성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그것을 집전하는 사제 입장이나 참여하는 신자 입장이 아니라 미사와 성사를 통해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사의 정의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 은총의 가시적 표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하느님 은총이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한정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는 일을 멈추지 않으시므로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한 신자들의 노력도, 그 사랑을 보다 성실하고 적극적으로 드러내 보여야 할 사제들의 노력도 결코 멈춰선 안 되는 것입니다. 미사와 성사의 주인은 온전히 세상과 인간을 사랑하시고 필요한 은총을 허락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이시며, 그 은총의 근원은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원성사(原聖事)라 표현해 왔고,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는 사제의 개인적 신앙이나 성덕(聖德)과 관계없이 성사 자체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드러나고 전해진다고 이해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성사의 사효성(事效性)에 대한 교리가 미사와 성사에서 사제들의 성실성이 배제된다거나 요구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사를 통해 주어지는 은총의 주도권이 하느님께 있다는 사실은, 성사를 집전하는 사제들이나 성사에 참여하는 신자들이 하느님의 뜻을 가리거나 축소시키지 않도록 더욱 겸손하고, 성실해야 함을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사제들은 성품성사를 통해 교회로부터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는 매우 특별하고 고귀한 직무를 받았습니다. 그 직무가 특별하고 고귀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히 사제들이 미사와 성사를 ‘집전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성사적 존재’로서 자신의 소명(召命)을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이 집전하는 미사와 성사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기억한다면, 사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신자들이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충실하고 겸손한 전달자가 되어야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미사와 성사가 중단되거나 제한된다고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중단되거나 제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제들에게 맡겨진 ‘성사적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말해선 안 됩니다. 미사와 성사에서 사제들의 역할은 그 예식을 거행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제들은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복음을 묵상하고 성실히 강론을 준비합니다. 미사가 거행되는 30분 내지 1시간만 일하는 것이 사제의 역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체성사가 이루어지는 미사를 포함하여 사제가 집전하는 다른 성사들도 그렇습니다. 가령 고해성사를 집전한다고 했을 때, 사제는 고해성사를 청하러 온 신자의 고해 내용을 듣는 그 시간만 자신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잘 준비하고,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체험할 수 있도록 양심 성찰, 통회, 정개, 고백, 보속으로 이어지는 모든 단계에 도움을 주고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제들의 성사적 직무는 단순히 미사와 성사에 대해 신자들에게 교리 내용을 잘 가르쳐 주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사제가 ‘성사적 존재’라는 것은 신자들에게 사제의 존재 자체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제직, 특별히 보편사제직으로부터 선발되어 직무사제직을 살아가는 이들이 수행하는 사제직은 미사와 성사에서 특별한 기술을 갖게 되는 ‘기술직’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봉헌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일에 희생하고 헌신하는 ‘봉사직’입니다. 그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무던히 애쓰는 모습을 통해 신자들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항상 곁에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미사와 성사가 중단되거나 제한되면서 대면(對面) 기회가 줄어든 상황에서도 사제들이 더욱 왕성하고 분주하게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만남의 기회가 줄긴 했으나 사제들은 신자들과 더욱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미사와 성사 때만 만날 수 있는 사제가 아니라, 영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언제든 연락하여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제가 늘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신자들에게 매우 큰 힘과 위로가 될 것입니다. ‘코로나-19 신자 의식조사’ 결과에서 응답자의 75% 정도 되는 신자들이 “자신이 신앙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졌다.”는 항목에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는 미사와 성사가 중단되거나 제한된 상황에서 신자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내기 위해 스스로 노력해야겠다는 결심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들의 결심을 사제들이 함께 동반해주기 위해서라도 사제들이 성사적 존재로서 신자들과 더 가까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자들의 그러한 결심과 노력에서 올바른 방향을 알려주고 지치지 않도록 격려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신자들의 결심에도 사제들이 신자들 곁에 있음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면, 신자들은 신앙생활에서 사제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결국 열심한 신앙을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미사와 성사로부터 더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직무사제직과 보편사제직의 관계가 매우 독특하고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품성사를 통해 직무사제직을 살아가는 사제들은 저마다 삶의 자리에서 보편사제직을 살아가는 신자들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보편사제직을 살아가는 신자들 역시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사랑과 은총을 드러내 보여주는 직무 사제직을 살아가는 사제들 없이 그 신앙의 충만함에 이를 수 없습니다. 코로나로 사제들과 신자들이 서로 거리를 둘 수밖에 없지만 사제직에 관한 이 가르침은 바뀌지 않습니다. 사제들에게 주어진 ‘성사적 직무’가 ‘거리두기’라는 명목으로 훼손되거나 사제 스스로 안일해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신자들은 대개 두 가지를 체험했다고 말합니다. 미사와 성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거기에서 비롯된 미사와 성사에 대한 간절함, 그리고 미사와 성사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느끼게 된 일종의 자유입니다. 이 둘은 신앙생활에 대한 개인의 열심함의 차이라 볼 수도 있지만, 실상은 둘 다 신자들이 겪는 ‘위기’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미사와 성사에 대한 간절함이 해소되지 못하는 것, 미사와 성사로부터 멀어지는 것 모두 신앙생활에서는 큰 어려움이기 때문입니다. 미사와 성사가 제한되면서 신자들은 물리적으로 성당과 거리를 두게 되었고, 이러한 물리적 거리감이 점차 심리적 거리감, 영성적 거리감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 ‘불러 모아진 공동체’라 이야기하지만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것이 금지되거나 제한되는 상황에서 그 공동체성이 위협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 상황이 교회 구성원들이 교회 공동체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성찰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공동체’라는 의미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에 따라 물리적 거리감을 겪는 교회가 공감과 연대를 지향할 것인지 해체의 수순을 밟을 것인지를 추정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지니는 공동체성의 핵심은 그 중심에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점입니다. 이는 교회 공동체가 다른 일반 단체와 구별되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미사와 성사가 이루어지는 것도 그 중심에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이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기회나 계기 때문인 것은 아닙니다. 미사와 성사가 지니는 ‘현장성(現場性)’이라는 요소를 간과할 수 없지만, 미사와 성사를 거행하는 교회의 공동체성은 사제들의 ‘성사적 직무’처럼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미사와 성사가 중단되거나 제한되는 상황이라 해도 교회는 언제나 공동체이고, 교회의 구성원들은 언제나 그 공동체성 안에 머물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중심에 하느님이 계시고 교회 구성원들은 언제나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물리적으로 함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사제들과 신자들은 교회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각자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수행해야 할 고유한 몫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코로나로 미사와 성사가 중단되거나 제한되는 이 시기는 사제에게도 신자들에게도 휴가 기간이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잉여 시간이 아니라, 그동안 제대로 하지 못했던 일들이 무엇인지 살피고 제대로 했어야 했던 일을 성실하게 수행해나가야 하는 시기입니다. 미사와 성사가 중단되고 제한되는 이 시기가 “하느님의 시간”이라 표현하셨던 선배 신부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이 표현은 이제 더 이상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사제들이나 신자들이 자기 입맛대로 미사나 성사를 인식해왔다면, 이제는 세상을 사랑하고자 하시는 하느님 뜻을 가리거나 축소하지 않도록 사제와 신자들이 그 주도권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겸손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미사와 성사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야 한다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미사와 성사는 하느님께서 인간과 소통하시기 위해 인간과 눈높이를 맞추시는 지극한 사랑과 자비가 드러나는 장(場)입니다. 더욱이 코로나로 많은 어려움을 겪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더욱 절실합니다. 그러므로 코로나 시대를 겪은 교회가 미사와 성사에서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이 시기 동안 미사와 성사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인식을 성찰해 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온전히 드러내야 하는 사제들은 그 사명을 살아가는 참된 사제로서, 또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깨닫고 감사와 겸손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신자들은 성실한 신자로서 그동안 해야 했으나 하지 못했던 미사와 성사에 대한 올바른 준비가 무엇이었는지 살피는 회심(回心)의 기회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