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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 겨울, ‘상황 좀 잠잠해지면 보자’며 미루던 친구들과의 약속들은 꽤 오래 미뤄졌습니다. 주일학교도, 교사들과 따로 만나던 시간도 멈추고 교육과 연수도 취소된 채로 봄과 여름을 지나, 어느덧 아침저녁으로 꽤 쌀쌀한 계절이 되었습니다. 며칠 전 출근길에, 작은 손으로 마스크를 고쳐 쓰며 걸어가는 아이를 보았습니다. 어른의 손을 잡고 한 발 한 발 걷는, 아주 어린 아이였습니다. 순간 그 모습이, 익숙하게 마스크를 올리는 어린 아이의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왠지 모를 복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가끔은 원래 이렇게 살아왔던 것 같기도 하면서, 불과 작년의 일들이 굉장히 오래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전에 당연하고 자연스럽다고 여겼던 모습들이 많이 달라졌고, 새로운 자연스러움과 당연함이 생겨났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영역으로 자연스러움과 당연함이 옮겨가는 흐름의 한 가운데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들은 누군가에게는 매우 폭력적이기도 합니다. 당연한 범위에 속하지 않는 대상들이 있으니까요. 학교가 온라인 수업으로, 업무는 재택근무로 전환되고 어린이집 등원이 연기될 때, 몇 배는 많은 음식들이 집 앞으로 배달될 때를 떠올려봅니다. 이전의 당연함에서 새로운 당연함으로 버튼을 누르듯 바뀝니다. 그럴 때 또다시 소외되고 마는, 새롭게 소외되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서서히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낯선 환경에 내던져집니다. 교육, 돌봄, 노동, 환경 등 삶의 다양한 영역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목소리들은 현재의 변화 때문에 새롭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존재했지만 가려져서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혹은 감추고 외면하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언제나 불평등은 있었지만 그 차이가, 갈등이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는 지금의 상황을 발판 삼아 기술 발전에 열을 올리고, 변화와 성장의 기회라며 앞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다양하고 새로운 제안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여기 좋은 것이 있다고, 새로운 것이 있다고. 정말 좋은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기도 전에, 앞으로만 달려가고 있습니다. 누가 먼저 새로운 것에 멋지게 적응할지 경쟁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곳엔 좋은 운동화를 신고 가볍게 달려가는 사람도 있고, 맨발로 땅을 밟는 사람도 있으며 달릴 수조차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일상이 회복되기를 기대하는 동안 뒤쳐진 사람들을 잊고,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침묵으로 응대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무엇을 외면했는지, 스스로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코로나 이전의 일상이 정말 ‘호시절’일까요? 우리가 되찾아야 할 일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촘촘히 세워진 계획과 틀에 맞추기 위해 아등바등합니다. 기계화되고 관습적인 세상에 익숙해져, 가만히 앉아 쉬는 것을 힘들어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삶이 언제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최근의 우리는 아주 잘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크고 작은 영역에서 당장 이번 주의 일도, 내일의 상황도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 정면으로 마주하니, 불안한 표정과 마음으로 살아가던 우리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동선이 공개된 사람에 대해 어떠한 근거도 없는 말들로 비난하며, 이곳저곳에 책임지고 당장 대책을 내놓으라고 탓합니다. 보이지 않고 알 수 없으니, 불안한 마음이 더욱 커져가는 듯합니다. 불평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하지만, 우리는 허공에 불평만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좋지 않은 마음을 쓰고 비난하면서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리고 또다시 외면하며 초조함을 안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각자가 돌아가야 한다고 여기는 일상을 향해서, ‘좋은 시절’을 향해서.

정말로 지금의 어려움이 회복되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함께 이겨낼 수 있다.’라는 말은 여기저기서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정작 개개인은 그 ‘함께’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앞으로 달려 나가면서 외면하는 것들, 사람과 동물과 환경의 목소리를 내는 곳들이 있습니다. 불확실한 상황일수록 끊임없이 이야기해야 할 '공동의 가치'를 놓지 않는 곳들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제안하는 가치를 경험한 사람들은, 함께 공감하고 그것을 또 이어나갑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실천하고, 그 가치를 경험한 또다른 사람들이 시도하고 참여합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어려움 속에서도 함께할 수 있는 방향은 어디인지 고민합니다. 무엇이 좋은 방향인지 함께하는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고,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것이 변화를 일으키는데 훨씬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이렇게 공동체에서 배우고 퍼져나가는 모습이 곧 ‘함께’ 이겨내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오히려, 나와 연결되어 있는 많은 것들을 느낍니다. 서로 눈 마주치며 손을 잡고, 몸을 부딪치며 만나는 날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물리적인 만남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를 생각하고 마음이 닿아있는, 다양한 관계 안에서 지내왔습니다. 나만, 우리 가족만, 우리나라만, 인간만 존재했던 적이 없습니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관심을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함께함으로써 연결되고 더 넓은 이야기를 나누며 기도해야 할 때임을 마음 깊이 느낍니다.

‘다시 제자리로.’ 이전의 모습들은 정말 저마다의 자리가 맞을까요? 혹시 다른 것들을 배제한 제자리는 아니었을까요. 고요한 밤의 거리, 사람의 발길이 끊긴 해변에 동물들이 돌아오는 모습, 미세먼지 없이 맑아졌던 하늘을 떠올려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제자리의 일부는 '밀어내고 차지했던'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차지한 자리가 또 당연하다고 여기며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이겨내고 이 상황을 끝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외면하고 잊으려 했던 관계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무조건 비난하는 닫힌 마음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러한 변화를 마주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우리 삶을, 나의 주변을 똑바로 바라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역할은 무엇’이며 ‘어떤 것이 옳은 자리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것을 위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특히 저와 같은 청년들 중에는 ‘나 하나 먹고 살기 힘든’ 저마다의 삶 속에서 망설이거나 등을 돌리는 사람이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를 지치게 하는 새로운 경쟁의 물결 앞에서 또 어디로 가야 하는지 혼란스럽고, 위축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스스로에게 다채로운 질문을 자주 던져보면 좋겠습니다. 저에게는 그런 시간들이 무리해서 붙잡아 왔던 것, 새로운 곳에서 잊었던 소중함을 알아차리게 했습니다. 마음속에 어떤 것을 채워 넣기도 하고, 때로는 덜어내기도 하는 유연한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조금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물러나, 자신과 우리를 이루는 관계를 조금 더 들여다보면서 함께 연결되고 더 많이 이야기 나누기를 희망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또 어떤 모습으로 생활하고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거대한 변화를 겪었고, 앞으로도 계속 겪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빠르게 흘러가는 변화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조금 천천히 가면서, 서로 기다려주고 다정한 눈길로 함께 미래를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코로나19 극복을 청하며 우리는 성모님께 의탁합니다. ‘저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고 마련해 주실 것을 믿나이다.’ 세상을 연결되어있는 공동체로 바라보고 기도할 때, 우리는 정말로 '필요한 것'을 오롯이 주님께 맡기며 청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보다 나은 개인, 가족, 공동체의 삶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발걸음을 내딛게 될 것입니다.

김예나 로사(일산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