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을 넘어서기 88 ∎ 사랑의 고유한 가치 91 ∎ 훨씬 더 열린 사랑 95 ∎ 모두를 통합하는 열린 사회 97 ∎보편적인 사랑에 대한 부적절한 이해 99 ∎ 이해관계가 같은 동료들의 세계를 넘어 101 ∎ 자유, 평등 그리고 형제애 103 ∎ 인간을 고양시키는 보편적 사랑 106 ∎ 도덕적 선의 장려 112 ∎ 연대의 가치 114 ∎ 사유재산의 사회적 역할 재 구상 118 ∎ 국경없는 권리 121 ∎ 민족의 권리 124
모든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사랑은 유대를 형성하고 존재를 확장합니다. 사랑은 사람들을 자신과 타인한테로 이끌기 때문입니다.[65] 우리는 사랑을 위해 창조되었기에 우리 각자한테서는 ‘황홀경(extasis)의 법칙’이 작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랑하는(사랑에 빠진) 사람은 다른 사람한테서 더 완전한 존재를 찾기 위해 자신 ‘밖으로 나갑니다.”[66] 이러한 까닭에 “사람은 항상 자신을 넘어 움직이는 도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67]
내 인생을 작은 집단, 내 가족을 포함하여 그렇게 좁은 관계로 축소해선 안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 전체를 형성하였고 자신보다 앞서 있었던 관계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관계의 연결고리 없이 자신을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과 관계할 때는 그들이 나만을 위해 살지 않고, 나도 그들만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의 관계가 건강하고 진실하다면 우리를 확장하고 풍요롭게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을 열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가장 고귀한 사회적 본성은 깊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자기중심적 대화 탓에 쉽게 왜곡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진정성 있고 성숙한 사랑과 진정한 우정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성장할 수 있는 마음에서만 뿌리를 내릴 수 있습니다. 커플 혹은 친구로서 우리는 우리 마음이 자신을 벗어나 타자를 받아들임에 따라 자신이 확장된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자신을 타자들과 대척점에 있는 존재로 보는 폐쇄적 집단과 자기 자신에 빠져 사는 커플들은 이기적이고 그저 자신의 세계만을 지키려는 존재로 보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의미심장하게도 사막 지역에 사는 작은 규모의 공동체들은 환대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순례자를 환영하는 경이로운 체계를 개발했습니다. 중세 수도원 공동체도 베네딕토 규칙서에서 볼 수 있듯이 비슷한 일들을 했습니다. 베네딕토 성인은 나그네 환대가 수도원 규율과 침묵을 훼손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최대한의 돌봄과 관심으로 가난한 이들과 순례자들을 대해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68] 환대는 자신의 관계망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도전과 은총에 이르는 한 가지 구체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수도승들은 자신이 실현해야 할 가치들은 타자들에 대한 개방을 통해 기꺼이 자신을 초월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도덕적 가치로 보일 수 있는 특정 습관, 즉 인내, 절주, 근면과 유사한 덕들을 계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도덕적 미덕들이 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확인하려면 그 행위가 얼마나 타인에게 열려 있고, 일치를 촉진하고 있는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이 행위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사랑(자비)이 없으면 우리는 삶을 지탱하기 어려운 명목상의 미덕만 익힐 수 있을 뿐입니다. 이 때문에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을 인용하며 탐욕스러운 사람의 기질로는 결코 덕을 닦을 수 없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69] 보나벤투라 성인은 자비가 없는 다른 미덕으로는 엄밀히 말해 ‘하느님이 덕을 쌓길 바라시는 방법’인 계명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 하셨습니다.[70]
한 인간의 삶에서 영적 성장의 정도는 사랑으로 측정할 수 있습니다. 결국 자비가 ‘인간의 삶이 가치가 있었는지 아니면 가치가 결여되어 있었는지를 결정하는 최고의 기준’입니다.[71] 그러나 일부 신자들은 이 기준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모든 사람에게 부과하거나. 진리를 공격적으로 수호하거나, 힘을 드러내놓고 과시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자인 우리 모두는 사랑이 첫 번째 자리에 와야 한다고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을 절대 위험에 빠트려서는 안 됩니다. 가장 큰 위험은 사랑하는데 실패하는 것입니다.(1코린 13,1-13 참조)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능해진 사랑을 다른 사람을 향해 바깥으로 움직여나가는 운동으로 묘사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든 우리 자신과 일치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72] 다른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가지면 우리는 자유롭게 상대방의 선(善)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존중감, 타자의 가치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자선’이라는 단어 이면에 숨어있는 뜻입니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나에게 ‘소중’합니다. “그들은 큰 가치를 갖는 존재로 간주됩니다.”[73] 그리고 “누군가가 다른 이에게 기쁨이 됨(grata)으로 말미암아 이 기쁨을 누리게 된 이가 무언가를 기쁨을 자신에게 준 이에게 자유롭게 줄 수 있습니다(gratis).[74]
그러므로 사랑은 일련의 자비로운 행동들 그 이상입니다. 그러한 자비의 행위들은 그들의 신체적 외모 또는 도덕적 풍모와 별개로 타인들을 가치 있게 여겨 그들을 소중하고, 기쁨을 주며, 아름답다고 생각하여 점차 타자들을 향하는 일치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타자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 그리고 있는 그대로인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그들한테 최상의 것을 찾도록 우리를 움직이게 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을 익힐 때만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사회적 사랑과 모두에게 열려 있는 형제애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또한 우리를 보편적 친교에 이르도록 추동합니다. 아무도 타자에게서 물러나 성숙할 수 없고, 성취감도 얻을 수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사랑은 개방성이 자라고 모든 주변이 더 큰 상호 소속감으로 수렴되는 지속적인 모험의 일부로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마태 23,8)
우리 자신의 한계를 초월해야 할 필요성은 다른 지역들과 국가들에도 해당됩니다. 실제로, “현대 세계에서 점점 더 횟수가 늘어나고 있는 상호 연결과 통신은 우리에게 국가들의 일치와 공동 운명을 강하게 의식할 수 있게 해주고 있습니다. 역사의 역동성과 인종 집단들, 사회, 문화의 다양성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받아들이고 돌보는 형제자매로 구성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라는 소명의 씨앗들을 보게 됩니다.”[75]
일부 주변부는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도시 한 복판이나 우리 집안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리적)공간이 아니라 실존적 사랑 안에서 널리 자신을 개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친구의 범위를 넓히고, 그들이 나와 가까이 있어도 자연스레 자신의 관심의 일부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매일 노력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모든 형제자매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버려지거나 무시되면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더라도 실존적으로는 외국인이 됩니다. 그들은 완전한 권리를 가진 시민일 수 있지만 자국에서는 외국인처럼 취급받습니다. 인종 차별은 사라지는 대신 빠르게 변이를 일으켜 숨어 몰래 기다리는 바이러스와 같습니다.
사회에서 이물질 취급을 받는 ‘숨어 있는 망명자’ 중 일부를 언급하고 싶습니다.[76] 많은 장애인들은 “소속과 참여 없이 존재한다고 느낍니다.” 여전히 많은 것들이 그들에게 완전한 권한을 부여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그들을 돌보는 일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와 교회 공동체에 적극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힘들고 심지어 피곤하기까지 한 과정이지만, 각 개인을 고유하고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는 양심 형성에 점차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장애 때문에 종종 짐으로 여겨지는 노인들”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 각자는 ‘놀라운 삶의 이야기를 통해 공동선을 위해 나름의 기여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반복하겠습니다. “장애로 차별받는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