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안드레아 신부 / 고양동 성당
신종 코로나 감염증 바이러스(COVID-19)는 인간 삶의 여러 차원에서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였습니다. 물론 ‘신종’이라 해도 인류가 이런 난관을 처음 겪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이미 구약시대부터 세상을 휩쓴 전염병에 관한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많은 질병들은 대부분 기후 변화에 따른 것이었는데, 사람들은 이 기후위기를 과도한 열기와 나쁜 날씨가 지속될 때 밀 이삭에서 생기는 증상들로 알아차렸습니다. 이를테면 파라오는 환시를 통해 “샛바람에 바싹 마른 이삭이 솟아난”(창세 41,6 참조)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 외에도 메뚜기 떼가 출몰하는 자연재해, 온갖 질병과 환난은 하느님의 창조 질서가 무너지는 바로 그 지점에서 발생하곤 하였습니다. 전염병 형태는 달라도 온갖 질병으로 인류가 위기를 겪는 사실 자체는 새롭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매번 그러한 위기를 인류는 어떻게 극복해 왔는가를 살펴보는 일일 것이고, 성경이 전하는, 위기에 대처하는 인간의 태도와 방식을 성찰하는 작업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솔로몬이 바쳤던 다음의 기도는 여전히 유의미합니다.
“이 땅에 기근이 들 때, 흑사병과 마름병과 깜부깃병이 돌거나 메뚜기 떼와 누리 떼가 설칠 때, 적이 성읍을 포위할 때, 온갖 환난과 온갖 질병이 번질 때, 당신 백성 이스라엘이 개인으로나 전체로나 저마다 마음으로 고통을 느끼며, 이 집을 향하여 두 손을 펼치고 무엇이나 기도하고 간청하면, 당신께서는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으시어 용서해 주시고 행동하십시오. 당신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아시니, 그 모든 행실에 따라 갚아 주십시오. 당신만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십니다.”(1열왕 8,37-39)
여기에서 솔로몬은 두 가지 중요한 지점을 보여줍니다. 먼저, 솔로몬은 불가항력적 재난 앞에서 두 손을 펼치고 무릎 꿇어 하느님께 간절히 의탁하는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때 솔로몬은 고통에 대하여 ‘개인’과 ‘전체’라는 두 가지 차원의 범주로 이해하는 지혜(1열왕 8,37 참조)를 보여줍니다. 둘째, 인류가 겪는 고통은 언제나 개별적인 동시에 집단적일 수 있는 것으로, 이는 위기를 진단하고 대처하는 방식에서도 개인 차원과 공동체 차원의 것이 각각 심도 있는 조망과 대안을 모색하되, 궁극적으로는 두 범주가 적절히 균형을 이루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저는 코로나19 확산이라는 위기에 직면하여 먼저 인간이 가진 존재방식에 기초하여 문제를 바라보고, 개인과 전체가 이루는 조화 안에서 교회의 극복 방향을 설정해보고자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행복의 조건 중 하나로 ‘지속 가능성’을 꼽습니다. 행복은 일시적으로 환희에 찬 감정이나 쾌락, 또는 어느 순간에 찾아오는 평안한 심리적 상태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행복이란 인간의 정신과 사유를 포함한 모든 활동 안에서, 단순히 일회적 행동이 아니라 그것을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삶의 형태를 의미합니다. 인간은 무엇이든 지속 가능한 삶을 살아갈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 사태는 인간의 ‘지속 가능한 삶의 형태’를 무참하게 깨뜨렸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보편적 인간 행복의 조건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만 것입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전인격적 존재에 가해진 이 균열을 우리는 ‘중단’이라 부릅니다. 인간의 활동 영역은 좁아졌고 관계는 고립되었습니다. 이 특수한 단절 현상은 심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인간 존재에 ‘코로나 블루(우울감)’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신앙 영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당에서 미사가 중단되는 사태가 여러 번 발생했습니다. 긴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행해온 신앙의 영역에서 ‘끊김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체성사 중단뿐 아니라 성당 출입 자체가 통제되는 상황도 겪어야 했습니다. 매일 모시던 성체는 강제 단식 상태에 빠졌고 감실 앞에서 기도하던 지속적인 성체조배 역시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성사와 성체에서 힘을 얻어 살아가던 신앙인들에게는 ‘성사적 블루(le bleu sacramentel)’가 찾아온 것입니다. ‘지속성의 결여’가 인간의 행복에 심각한 결핍을 초래하는 것처럼, 성사의 중단은 이처럼 신앙인의 행복 지수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이 성사 중단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을 성찰할 때, 앞서 솔로몬의 기도에서 본 바와 같이, 개인 신앙의 차원과 공동체 사목 차원을 구분해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 신앙이나 본당 공동체 차원에서 각각 지속적으로 행해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난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적인 지속성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도 공통적으로 <중단 없는 성사>에 있습니다.
미사 중단, 모임과 회합 중단이 왜 신자들에게 우울감을 일으켰는지 생각해 봅니다. 성사에서 주어지는 은총과 성체를 모시는 것에 대한 갈증이 근본 이유겠지만, 태초부터 부여된 인간학적 조건에 심각한 균열이 초래됐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대로 인간을 만드시고, 사람에게 ‘책임과 자유’를 부여하셨습니다. 태초에 남자와 여자는 에덴동산에서 자유를 만끽하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한과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됩니다(창세 3장 참조). 인간이 가진 자유는 스스로 선택하는 힘, 곧 ‘자발성’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고 그것에 책임을 진다는 의미에서 모두 자발적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일어난 성사 중단은 전혀 자발적이지 않았습니다. 방역지침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별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번 성사 중단 사태는 외부 조건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결정한 수동적 선택이었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차단’ 당한 셈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발성이 ‘박탈’된 것에 가깝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므로 책임을 질 이유를 딱히 못 느낍니다. 내가 미사에 ‘안’ 가는 것이 아니라 ‘못’ 가게 된 상황에서는 주일을 궐한 것에 대한 의식도 둔감해지기 쉽습니다. 이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신앙에서 자발성이 결여된 신앙으로 바뀌는 상황으로,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 자신이 사태의 중심에 그냥 내던져지게 된 것입니다. 자발성 결여에서부터 깊은 우울감이 시작됩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행동과 행위에 책임을 지는 과정에서 성취감 내지 행복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 모든 통로가 막혀 버렸습니다. 선택과 책임이라는 혈관이 막혔으니, 이내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성사에 대한 ‘책임 의식’은 낮아졌습니다. 성사 참여 중단이 내가 스스로 결정한 ‘자발적 선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발성에 관한 성찰은 우리 생각을 전환할 수 있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방역수칙에 의해 미사 참례가 중단된 것이 나의 자발적 선택이 아니었다고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국민의 생명과 인권, 안전을 위한 일에는 적극적으로 함께 한다는 ‘연대성’ 원리의 사회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 구성원인 개별 신앙인은 코로나19 사태로 엄중한 상황에서 국가의 방역지침을 준수하고 적극 동참해야 할 그리스도인로서의 의무가 있습니다. 요컨대, 자발성 결여에서 시작된 ‘성사적 블루(우울감)’를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의 자발성을 되찾음으로써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학의 또 다른 범주는 모든 인간 존재는 ‘공동체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타자로부터 어떤 요구 또는 ‘말 걸어옴’을 받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응답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응답은 단지 말로써 하는 대답뿐 아니라 사물에 대한 내적 운동이나 사건에 대한 판단이나 사유, 그리고 외적 행동이라는 의미에서 태도의 선택까지 포함합니다. 홀로 살아가지 않는 한, 내가 아닌 타자의 반응을 받아들이지 않고 존재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만약 내가 타자의 반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사유 과정을 통해 무반응이라는 태도를 결정한 것이라는 점에서 인간에게 무관심성이나 중립성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한 응답을 요구하는 쪽과 응답을 하게 되는 두 존재의 관계 얽힘이 곧 인간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만남’이라 부릅니다. 두 존재 이상의 이 ‘만남’ 속에서는, 나에게 흥미가 있든 없든, 어떤 같은 관심사에 대해 대화할 수밖에 없는 ‘공통 대상성’이 발생합니다. 모든 인간 관계에서 발생하는 이 만남의 법칙을 ‘공동체성’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공동체성은 일회적이거나 순간적 만남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대상들을 함께, 지속적으로, 건강하게 보존할 때 발생하는 무엇입니다. 이를테면, 한 민족은 같은 땅과 역사를 공유하면서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며 그들의 문화를 건강하게 보존하려 합니다. 지속적으로 함께 지켜내야 할 것이 있기에 같은 민족이라는 공동체성을 유지하게 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들은 같은 전례 안에서 성사의 은총을 공통되게 체험함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보존합니다. 신앙을 함께 지켜내고 신앙의 유산을 전수해야 하기에 같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공동체성을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동체성은 인간 존재의 ‘만남’과 ‘관계 형성’을 통해 지속적으로 또 건강하게 보존되어 왔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공동체성을 통해 타자를 이해하고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코로나19 사태가 인간이 태생적으로 가진 공동체성을 갈라놓고 말았습니다. 서로 마주할 수 있는 장을 차단했기 때문입니다. 생활 영역의 많은 부분이 비대면 방식으로 전환된 것입니다. 그런데 비대면 방식은 ‘공통 대상성’을 형성하기 어렵습니다. 성경 공부나 레지오 회합 등에서 형성되었던 것은 대면 방식에서 발생한 ‘공통 대상성’과 ‘공동체성’이었습니다. 성경을 ‘함께’ 읽고 ‘지속적’으로 묵주기도를 바치고 활동 보고를 듣는 것은 공동체성을 이끌어가는 하나의 길이었습니다. 정기적인 소공동체 모임을 통해 삶을 성찰하고 생활을 나누는 일은 공동체성을 건강하게 ‘보존’하는 역할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직접 마주할 수 없게 됨으로써 인간 존재는 고독해지거나 관계의 질이 떨어졌습니다. 공동체성이 결핍된 인간은 아무래도 고립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미사 중단, 혹은 온라인을 통한 비대면 미사는 그 성사성은 차치하고라도 온전히 교회적일 수 없습니다. ‘교회(에클레시아, ecclesia)’라는 말 자체가 하느님께서 불러 모인 ‘회중’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모임’은 집합의 의미를 넘어 직접 마주함으로 발생하는 공통 대상성을 발생시키는 만남의 법칙을 의미합니다. ‘모임’이라는 공동체성 안에서 타자를 받아들이고, 타자를 이해하며 자기 자신까지 성찰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지금 무너진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일이 절실합니다. 그것은 서로가 연결되어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대면 모임이 중단된 상황에서도 우리는 서로 이어져 있음을 확신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