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 프란치스코 / 교구평협 교육연구분과위원장
남한 인구의 43.9%가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전수 부문 기준). 통계청이 1985년을 시작으로 매해 5자로 끝나는 해에 종교 인구를 조사하였는데 전체 네 차례 가운데 1985년이 42.6%로 가장 적었고, 2005년이 52.9%로 가장 많았습니다. 전체 인구에서 종교 인구 43.9%는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수치입니다. 우선 ‘적다’는 의미는 종교의 자유가 허용된 나라에서 종교 인구는 대부분 90% 이상인데, 50% 이하인 경우는 전 세계에서 우리가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많다’는 것은 종교 인구 비율이 높아도 실제 능동적으로 종교생활을 하는 신자들의 비율까지 높은 나라는 많지 않아 남한의 종교 인구 40%대도 높은 수치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자신이 종교인이라 답한 43.9%가 모두 자신이 속한 종파와 교단에서 적극적으로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명한 사회학자 피터 버거(Peter Berger)는 1960년대 중반에 종교 인구, 특히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20세기 말에는 현저히 줄어들 것이라 전망하였습니다. 그가 이 말을 하던 시기는 서구에서 세속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전 세계 종교 인구는 그의 예측과 달리 폭증하였습니다. 그는 이 결과에 난감해하며 이러한 흐름을 ‘재성화(resacalization)’라 명명하였습니다. ‘종교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진다.’는 의미입니다. 아울러 그는 자신의 무모함을 탓하며 종교에 관한 한 더 이상 예측을 하지 않겠노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재성화가 일어난 곳은 지리적으로 적도(赤道) 이남이었습니다. 적도 이북 지역에서는 소련이 해체되며 체제 전환을 한 동유럽 국가들과 동아시아의 남한에서만 유일하게 종교 인구가 크게 늘었을 뿐입니다. 종교 연구자들은 종교를 떠나는 사람들에 대하여는 관심이 많지만 그들이 왜 종교에 머무는 지에 대하여는 관심이 적습니다. 입교 동기에도 관심이 적지 않으나 종교에 머무는 일에 대하여는 확실히 관심이 적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저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북반구에서 그리스도교의 쇠퇴가 일어나고 있음에도 여전히 종교•교회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이 머무는 이유는 단일하지 않습니다. 입교를 선택할 때, 해당 종교를 떠날 때의 이유들 만큼이나 다양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사람 수만큼 존재합니다. 이처럼 다양한 이유들이 있어도 종교사회학자들은 크게 몇 가지 범주로 축소해 바라봅니다. 모두에게 일일이 물을 수 없으니 불가피한 선택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종교에 남아 있는 이유들은 정치경제적인 데서부터 심리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거시 세계와 미시 세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변인(variable)들이 한 개인의 삶 안에 중층 복합적으로 얽혀 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이렇게 종교인/신앙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종교, 종교공동체의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해줍니다.
오늘날에도 종교가 현대인에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산(資産)은 ‘검증되고 안정된 의미 체계’입니다. 의미 체계는 사람이 살면서 경험하는 일들, 또는 다가오는 현상들을 해석하는 틀입니다. 이를테면, 아침에 설거지를 하다 접시를 깼다고 가정해봅니다. 어떤 이는 이 일이 우연일 뿐이라 생각해 별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반면 어떤 이는 이를 오늘 하루 재수가 없을 징조로 해석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작은 일에서부터 인생의 중요한 일들에 이르기까지 대분의 일들에 대해 의미를 부여합니다. 종교인들이 종교를 갖지 않은 이들에 비하여 이렇게 행동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인생이라는 불확실하고 모호한 사태에 대해 종교인들은 자신이 선택하거나 부모가 물려준 종교라는 의미체계를 통해 인생의 방향, 좌표와 경로를 설정합니다. 종교가 일종의 내비게이터(navigator)인 셈입니다. 이 내비게이터가 자신이 부여한 신뢰를 거둘 만큼 오작동을 자주 일으키지 않는 한 대부분은 이를 고수합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에서 종교는 비전(vision)이기도 합니다. 한 치 앞을 넘어 수십 년, 심지어 수백, 수천 년을 이 틀로 보게 해줍니다. 이러한 고도의 항법 장치는 불확실성의 영역을 확실성의 영역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우리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합한다. 무엇보다 가톨릭은 2천년 전통에다 구약으로 대변되는 유대 역사까지 포용함으로써 적어도 3천여 년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종교를 거쳐 간 수 많은 신앙인들의 삶을 통해 검증되고 안정화되었습니다. 가톨릭 하면 갖게 되는 안정감은 이런 역사와 전통에서 비롯됩니다. 세상이 종교를 걱정하는 시대라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런 검증되고 안정된 의미 체계를 제공할 수 있는 곳은 극히 소수입니다. 우리가 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2018년 1월 영국에서는 ‘외로움 장관(Minister for Loneliness)’을 임명했습니다. 외로움이 국가적 문제라는 인식의 결과였습니다. 외로움은 스스로 선택하는 고독(solitude)과 구별되는 감정이자 상태입니다. 고독은 개인이 타인과의 관계를 의식적으로 단절하고 자신과 직면하는 시간과 공간입니다. 자발적이고 성찰적입니다. 반면 외로움은 비자발적이고 구조에서 강제된 측면이 강합니다. 이 외로움은 ‘근심, 무력감, 짜증, 분노 등의 부정적 감정을 수반’하고, 심할 경우 자살, 반사회적 행동으로 이어지는 무서운 질병입니다. 이 외로움은 위기 상황에서 발생하고 깊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다수에게는 위기로 체험됩니다. 이러한 ‘위기’는 개인에게 공포감을 유발하는데, 공포감은 의지할 존재가 없을 때 더 커집니다. 정상적인 나라에서는 국가가 개인이 위기 상황에서 기댈 수 있는 가장 큰 언덕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국가는 과거와 다릅니다. 초국적 기업과 강대국이 지배하는 국제기구 등의 압박으로 국민을 보호하는 기능을 현저히 약화시킨 상태입니다. 그래서 공공(公共) 보호 체계마저 시장 논리를 따릅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비용 최소화’라는 유연한 경계를 강조하며 시장 논리를 추구하는 의료체계를 가진 나라일수록 보호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나라들처럼 국가의 보호가 사라지거나 약화된 곳에선 개인이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상황이 빈번히 발생합니다. 요즘 일본 상황을 이에 비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국가에서 개인의 실패는 온전히 자신의 능력 부족에서 생긴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합니다. 이런 이유로 ‘지구적 시장’ 속에서 자기 책임 윤리를 내면화한 개인들은 일상화된 위기 속에서 다른 이들과 쉽게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대다수 개인들은 구조적으로 세계가 변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자신의 삶은 자신이 책임지는 것이라는 윤리를 당연하게 여깁니다. 이제 개인의 실패는 사회구조적 문제라기보다 개인의 능력 탓이 되었습니다. 책임은 더이상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이 온전히 책임져야 할 일입니다. 이런 ‘자기 삶의 책임윤리’가 만드는 삶의 방식이 지배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들은 파편화된 채 집단적으로 ‘외로워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외로움은 이렇게 구조가 강요한 개인의 사회적 고립, 고령화, 전통적 가족의 해체, 산업구조의 변화와 이에 따른 생활양식의 변화에 따른 1인 가구 증가 등의 이유로 발생하고 있고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2018년 4월에 만 19세 이상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국리서치가 실시한 웹 설문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도 외로움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조사 결과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26%가 일상적으로(항상+자주) 외로움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가끔 느끼는 경우’까지 합하면 77%가 외로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조사 결과에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세대 변인에서 젊은 세대일수록 외로움을 체감하는 비율이 높게 나타난다는 점이었습니다. 특히 20대 여성이 가장 취약하였습니다. 대구 신천지에서 20대 여성 코로나19 확진자가 많았던 것이 우연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이 외로움이 일상화된 사람은 덜 느끼는 사람들에 비해 ‘걱정, 무력감, 짜증, 분노’를 경험할 가능성이 4~5배 높았습니다. 이러한 부정적 감정은 일차적으로는 이를 경험하는 당사자를 피폐화하고 심한 경우 타인을 공격하여 피해를 입힙니다. 종교는 이런 이들에게 가족과 같이 기댈 수 있는 ‘준거 집단(reference group)’,지지(support) 집단으로 기능합니다. 신천지가 20대를 노렸던 것은 20대가 이 외로움 문제에서 가장 취약한 집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천지는 방향이 잘못된 곳이라 예외지만, 종교는 이러한 외로움을 완화시키는 데 도움을 줍니다. 종교에 소속되거나 적극 참여할수록 이 외로움은 크게 줄어듭니다. 소속이 안정감을 제공하고, 신자들과 비(非)타산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사회적 고립감이 줄어들며, 외로움도 덜 느끼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소통이 외로움을 덜 느끼게 하는 수단이지만, 종교에서 이뤄지는 관계 네트워킹과 이 네트워크에서 이뤄지는 소통은 외로움을 더 효과적으로 감소시킵니다. 외로움을 느끼는 이들에게 종교는 여전히 필요하고, 앞으로 더 중요해집니다. 교회가 이런 기능을 조속히 회복해야 신천지나 유사 종교집단에 젊은이들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속지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종교라서 지역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본당은 지역에서 성당(聖堂, 거룩한 집)으로 기능합니다. 성스러움을 체험하는 공간으로써의 성당입니다. 성스러움은 조경, 건축 양식, 성당 내부의 장식, 미술, 성물, 음악, 전례 등이 어우러져 형성됩니다. 무엇보다 성스러움은 신자들의 모습을 통해 드러납니다. 일생을 하느님께 바친 성직자, 수도자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하느님이 살아 계심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신자들이 입당할 때 성수를 찍고 기도문을 외우는 모습, 장엄한 전례, 경건하게 전례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모습, 성당의 고요한 분위기, 전체적으로 엄숙함을 자아내는 공간은 비신자들에게 세속과 구별되는 공간으로 기능합니다. 당장 참여하지 않더라도 종교를 갖게 되면, 혹은 개종하게 되면 선택할 종교로써 일순위로 부각되는 가톨릭은 이런 성스러움을 일상과 자신의 삶의 공간에서 경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스러움을 종교학자 요아킴 바하는 ‘떨림’, ‘경이로움(놀라움)’, ‘신비스러움’이라 표현했습니다. 그만큼 성스러움은 낯선 경험입니다. 그러나 이 낯선 경험이 삶을 변화시킵니다. 한국인에게 가톨릭의 성스러움은 이러한 경이로움과 신비스러움으로 경험되는 듯합니다. 두렵지 않은 ‘낯섦’, 무엇인가 자신을 초월시켜 줄 수 있을 것 같은 ‘신비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분위기가 가톨릭으로 유인하는 매력이자 힘입니다. 젊은이들에게는 다소 무겁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성인에게 성당은 여전히 성스러운 공간으로써 일상을 초월하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문(門)역할을 합니다.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성당은 이런 공간으로 존재하고 있고 또 남아 있습니다. 이는 이미 이 공간에 들어와 있는 신자들에게도 같은 기능을 수행합니다. 이 힘이 얼마나 강한지 한국 천주교회는 선교보다 자발적 입교가 더 많은 종교입니다. 1980년대 이후로는 가장 개종자를 많이 얻었습니다. 비신자들도 성당하면 떠오르는 분위기가 엄숙함, 고요함, 성스러움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성당은 존재 그 자체로 제 역할이 있는 셈입니다.
성스러움의 결과는 이타적 존재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기적 존재가 이타적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 성스러움을 경험함으로써 맺게 되는 열매입니다. 미사에서 선포되는 성경 말씀과 몸으로 만나는 일치의 체험인 성체성사의 규칙적 반복, 선배 신자들의 모범, 교회 전체로서 실천하는 사랑은 구성원들에게 충분하진 않지만 점진적으로 이타성을 띠어가게 돕습니다. 성인으로 대표되는 모범적 신자들의 존재는 이러한 이타성을 향한 동기를 강화시킵니다. 직접 실천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그래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분위기가 성당에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를 실천하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직간접적으로 신자들에게 사랑 실천을 자극합니다. 이러한 성당의 분위기는 배타성을 띠기도 하지만 금기(禁忌), 낯선 이, 소외된 이들에 대한 개방성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흔합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자신이 평소 동의하지 않던 일들에 대하여도 교회의 가르침 때문에 선택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작지만 이런 변화가 있기에 성당은 이타적 변화를 가능케 하는 공간으로서 가치와 의미를 갖습니다. 성당에 다니다 보면 자신에게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변하게 마련입니다. 그 의미를 본인이 찾지 못하거나 강조하지 않아서 인지하지 못할 뿐 변화는 반드시 일어납니다. 모두라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남은 이들은 이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에 남아 있고, 이렇게 남아 있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이 교회의 힘입니다. 교회는 가깝게는 지역사회에서, 넓게는 세상에서 이타적 존재로 변화하는 길을 가리킵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기능입니다.
사회교리를 가진 종교는 가톨릭이 유일합니다. 사회교리는 성경, 성전(聖傳), 이성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특히 이성이 중요합니다. 사회교리에서 이성은 당대(當代), 그리고 교회 내 구성원들 간의 대화를 전제로 합니다. 가톨릭교회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평의회와 위원회들의 존재가 이러한 대화의 사례입니다. 이러한 조직을 구성하는 이들의 지식, 지혜, 당대 지성과의 대화에서 얻어진 성과들을 수용하는 능력은 가톨릭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종교들 가운데 으뜸입니다. 게다가 신자들이 이러한 가르침을 일상적으로 확인하고 배울 수 있는 종교 공동체는 가톨릭이 유일합니다. 검증되고 안정된 의미체계를 보완하는 이 측면은 신천지와 같은 집단, 유사 종교들, 심지어 제도화되었으나 체계가 미비한 종교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 측면은 신자들이 판단과 실천에서 오류의 가능성을 줄여줍니다. 또한 이는 가톨릭의 당대성(contemporariness)을 보증하는 핵심 측면이기도 합니다. 이는 신자들에게 늘 새롭게 제기되는 당대 문제들에 대하여 방향과 해법을 광범위한 합의에 기초해 제시하는 안전한 나침반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신자들만큼 다양합니다.. 어떤 신자는 성음악을, 또 어떤 신자는 성미술, 가톨릭 건축을 좋아해 남아 있다고 합니다. 가톨릭의 영성 전통, 다양성, 보편성을 좋아하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고딕식 성당에서 혼배하기 위해, 장엄한 장례미사가 좋아 신앙생활 한다는 신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가톨릭은 신자들이 갖는 이 다양한 기호(嗜好)들을 포괄하는 체계입니다. 가톨릭은 한국에서 처음 서구 문화의 기표(記表)로 수용되었습니다. 문명의 기호(記號)이기도 했습니다. 낯설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러나 강한 힘을 가진 어떤 체계로 다가왔다는 말입니다. 가톨릭은 이전에는 접해보지 못한 예술이자 문화였습니다. 그것도 종합 예술이었습니다. 종교가 삶의 다양한 차원을 포괄하듯, 종교 안에서 이뤄지는 많은 행위들이 종합예술을 구성합니다. 다양한 요소들이 포함된 만큼 다양한 기호와 선호를 갖는 신자들에 ‘호소’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여기에 가톨릭이 갖는 지구적 연결성(global network)은 이 다양성을 더욱 풍요롭게 합니다. 비신자를 매혹하는 흡인력이자 신자들을 결속시키고 머물게 하는 지속력이아닐 수 없습니다.
이상의 요소들은 가톨릭이 보편적으로 비신자나 신자들 모두에게 장점으로 인식되고 있는 점들입니다. 어떤 측면은 한국 사회에서 유독 좋은 평가를 받는 요소들이기도 합니다. 한국 사회의 경험이 반영된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장점들은 비신자를 가톨릭으로 끌어들이는 매력 요인이자 신자들을 교회에 계속 머물게 하는 동기 요인입니다. 특히 신자들에게는 교회 공동체가 존재하는 이유가 됩니다. 피터 버거는 종교가 갖는 다양한 측면을 보지 못해 당시 종교의 쇠퇴를 주장했습니다. 적어도 북반구에서는 제도 종교들이 쇠퇴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종교, 교파들이 쇠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침(浮沈)이 있었을 뿐입니다. 20세기 초반에는 20세기 말이면 그리스도교는 소멸할 것이라 주장하는 학자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예상과 달리 21세기 초반인 요즘도 그리스도교는 놀라운 적응력을 발휘해 생존에 성공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지구 남반구에서 지속된 신자 인구 증가추세에 비춰볼 때 이 흐름은 21세기에도 지속될 가능성이 큽니다. 오랜 전통을 가진 종교일수록 시대에 따라 갖고 있는 특정 측면들이 당대인들에게 소구력을 가지면서 지속성을 띠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국사회에서도 그러할 것입니다. 이 측면은 우리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면도 있지만, 시대 상황과 당대인들이 선택하는 측면이 더 많습니다. 현재 한국 교회는 이 소구력이 다소 떨어졌습니다. 장점을 충분히 살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최근 15년 동안 지속된 능동적인 신자 층 축소와 냉담 신자 숫자 증가에서 드러납니다. 한국 사회의 평가도 이전에 비해 박해졌습니다. 이 평가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국민들이 종교들에 대해 내리는 평가에서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역사 안에서 이런 상황을 시대의 징표로 알아듣고 쇄신의 노력을 경주해왔습니다. 물론 모든 노력이 성공하진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쇄신 노력의 결과로 신자들을 결속시킬 수 있었고,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신자들이 교회 안에 머물러 있어야 세상과의 대화도 시도할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러니 도전 앞에 무력하게 있을 것이 아니라 무엇이 이 시대에 호소력을 갖는지, 아니 필요한지 살피고 자기를 비워 타자(사람을 포함하여 교회 밖의 많은 요소들)를 포용하고자 할 때 재성화의 기회를 맞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항상 새로워야 합니다(Ecclesia Semper Reforman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