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문화를 향한 사회적 대화 199 ∎ 함께 세우기 203 ∎ 동의의 기초 206 ∎ 합의와 진실 211 ∎ 새로운 문화 215 ∎ 문화가 되는 만남 216 ∎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기쁨 218 ∎ 친절 회복 222
어떤 사람들은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의 작은 세계에 숨어 버리려 합니다. 다른 이들은 파괴적 폭력에 직면하여, “이기적 무관심과 폭력적 저항 사이에 선택할 수 있는 제3의 방안이 있습니다. 바로 대화입니다. 세대 간의 대화, 사람들 간의 대화는 우리가 모두 사람이기 때문에 주고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동시에 진리에도 열려있습니다. 국가는 대중 문화, 대학 문화, 청소년 문화, 예술 문화, 기술 문화, 경제 문화, 가족 문화, 미디어 문화 등 풍부한 문화적 요소들 사이에 건설적인 상호작용이 이루어질 때 번성합니다.”[196]
대화는 종종 매우 다른 것들과 혼동됩니다. 소셜 네트워크에서 이뤄지는 활발한 의견 교환은 항상 신뢰할 수만은 없는 미디어 정보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견 교환은 그저 평행선을 달리는 독백일 뿐입니다. 날카롭고 공격적인 어조로 다른 사람의 주의를 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백은 내용이 종종 기회주의적이고 모순적이라는 점에서 아무에게도 관련이 없습니다.
사실 미디어에서 보게 되는 사실과 견해의 어지러운 혼합은 대화를 자주 방해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이 틀렸다는 변명과 함께 자신의 생각, 관심사와 선택에 완고하게 집착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더 나쁜 점은 정치 선전에 대한 언론 보도에서 사용하는 이런 종류의 언어가 너무 널리 퍼져 모든 사람이 이를 매일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논쟁을 종종 더 큰 힘을 가진 특정 이해 관계자들이 조작하고, 이들은 거짓으로 여론을 유리하게 왜곡하려 듭니다. 나는 정부만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유형의 여론 조작은 경제, 정치, 커뮤니케이션, 종교와 기타 분야에서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론 조작이 힘 있는 자들의 경제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에 봉사하게 될 때는 이를 정당화하거나 변명거리를 찾으려 시도하지만, 조만간 그 조작은 이해관계를 해치게 될 것입니다.
대화의 부족은 이러한 개별 부문에서 사람들이 공동 이익이 아니라 권력자의 이익 또는 기껏해야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방법에만 관심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대화는 단순한 협상으로 축소되어 공동선을 창출하는 공통의 모색 없이 모든 사람이 전체 권력과 최대한 많은 이익을 얻으려는 시도로 변질됩니다. 미래의 영웅들은 이 건강하지 못한 사고구조를 깨는 방법을 알고 개인의 이익을 넘어 정중하고 진실로 가득한 생각을 키워나가기로 결정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바는 그러한 영웅들이 여러 좋지 않은 조건들을 마주하면서도 우리 사회 한복판에서 조용히 떠오르는(부상, 浮上) 것입니다.
진정한 사회적 대화는 상대방의 관점을 존중할 수 있는 능력을 전제로 하고, 그것이 신념이나 정당한 이익을 포용하는 능력도 포괄합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기여할 수 있고, 보다 유익한 공개 토론을 위해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개인이나 집단이 일관된 생각을 갖고, 가치와 신념을 확고히 고수하고,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킬 때, 이는 어떤 식으로든 사회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대화하고 개방성을 가질 때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실, “진정한 대화의 정신을 가질 때 자신의 신념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더라도 상대방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대화를 중단하지 않고 자신이 믿는 바를 숨기지 않고, 만날 수 있는 지점을 찾을 때, 무엇보다 함께 일하고 투신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197] 진정으로 모든 사람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조작하거나 정보를 은폐하지 않을 경우라야 공개 토론이 진실을 더 잘 파악하는데 지속적인 자극이 돼줄 수 있습니다. 최소한 더 효과적인 표현이라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토론은 다른 분야들이 각자가 사물을 보는 방식과 제한된 관심사에 만족하고 자기중심적이 되는 것을 막아줍니다. “차이는 창의적입니다. 차이는 긴장을 초래합니다. 그러나 이 긴장을 해결할 때 인류는 진보합니다.”[198]
전문화된 과학적 진보와 함께 더 많은 학제(學際) 간 의사소통이 필요하다는 확신이 커지고 있습니다. 현실은 하나지만 다양한 각도에서 다른 방법론으로 이에 접근 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의 과학적 진보가 삶, 사회와 세계의 특정 측면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렌즈로 간주될 위험이 있습니다. 대신, 자신의 연구에서 결실을 맺고 다른 과학 및 기타 지식 분야의 작업 덕분에 자신이 연구하는 현실의 다른 차원을 기꺼이 이해해보려는 연구자는 보다 통합적이고 완전한 방식으로 현실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 세계화 된 세상에서 “미디어는 우리가 서로를 더 가깝게 느끼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더 존엄한 삶에 대한 연대와 진지한 헌신에 박차를 가하는 인류 가족의 새로운 일체감을 인식시킬 수 있습니다. […] 미이어들은 특히 오늘날과 같이 인간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가 전례 없이 발전한 요즘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인터넷은 만남과 연대를 위한 더 큰 기회를 제공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고, 하느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199] 그러나 현재의 의사소통 형태가 실제로 우리를 관대한 만남, 완전한 진실, 봉사, 최소한의 친밀성에 대한 진지한 모색, 공동선을 구축하려는 헌신으로 향하고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검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동시에 호주 주교들이 지적했듯이 “우리는 우리의 약점을 악용하고 사람 안에서 최악의 것을 끌어내도록 설계된 디지털 세계”를 받아들여선 안됩니다.[200]
상대주의는 해결책이 아닙니다. 관용을 가장(假裝)하고 상대주의는 궁극적으로 도덕적 가치가 순간의 편의에 따라 권력자에게 유리하게 해석되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궁극적으로“객관적 진실과 건전한 원칙이 결여된 상에서 개인의 열망과 즉각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에 불과하다면 […] 정치 프로그램이나 법의 힘만으로 충분할 것이라 생각할 수 없습니다. […] 문화가 타락하고 객관적 진실이나 보편적으로 유효한 원칙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을 때, 법은 피해야 할 임의의 부과물 또는 장애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201]
인생의 깊은 의미에 답하는 진리를 찾기 위해 진리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 가능할까요? 오랜 성찰과 지혜의 여정을 통해 도달하게 된 ‘모든 인간이 신성하고 불가침적 존재’라는 확신이 없다면 도대체 법은 무엇을 위한 것이란 말입니까? 사회에 미래가 있으려면 우리가 따라야 할 인간 존엄성의 진실에 대한 진심어린 존경심을 키워야 합니다. 우리는 살인을 사회적 경멸과 법의 강제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더 심오한 생각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성으로 인식하고 양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타협의 여지가 없는 진리입니다. 사회는 또한 진리를 추구하고 근본적인 진리를 고수하기 때문에 고귀하고 품위가 있습니다.
우리는 진실을 통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에서 진실을 조작하고 왜곡하고 은폐하는 다양한 방식을 폭로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진실”이라 부르는 것은 일간지에서 볼 수 있는 사실과 사건의 보고뿐만이 아닙니다. 주로 우리의 결정과 법률을 지탱해주는 견고한 기초를 찾는 것입니다. 이 작업에는 인간의 마음이 즉각적 관심사를 초월해 과거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어떤 진실들을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본성을 탐구함으로써 이성은 동일한 본성에서 파생된 보편적 가치를 발견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은 침해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기본 인권이 무감각하고 겁에 질린 사람들의 “동의”를 얻고 나서 집권한 권력자에게 부정당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지 않을까요? 똑같이 조작 가능성이 높은 다양한 민족 간에 단순한 합의도 충분하지 않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우리가 실현할 수 있는 모든 선에 대한 풍부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는 내면에 파괴적 능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빠진 무관심과 무자비한 개인주의는 순간적 필요를 초월하는 최고의 가치를 추구하는 데 게을러 나타난 결과가 아닐까요? 상대주의에는 항상 강자(强者)나 영리한 사람이 일부 또는 다른 추정된 진실을 강요할 수 있는 위험이 따릅니다. 그러나 “내재적 악을 금지하는 것이 도덕적 규범의 문제라면 누구에게나 여기에 특권이나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세상의 주인인지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자'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도덕성의 요구 앞에서 우리 모두는 절대적으로 평등합니다.”[202]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우리를 왜곡되고 공허한 논리로 끌어들이는 것은 윤리와 정치를 물리학으로 축소하는 것입니다. 선과 악은 더 이상 스스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점과 부담만을 계산하는 데 불과합니다. 도덕적 추론이 제 위치를 찾지 못하면서 법은 더 이상 정의의 근본 개념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유행하는 개념을 반영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실패가 계속됩니다. 모든 것은 피상적인 물물 교환 합의에 따라 “하향 평준화”됩니다. 결국 힘의 논리가 승리하게 됩니다.